27 숙간공파 |
|
24세 충정(忠貞) 사예(정4품) 현감 종윤(宗胤)의 2자 문과급제 25세 첨경(添慶) 예조판서 사예 충정(忠貞)의 장자로 명종 5년(1550)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와 병조좌랑을 지내고 명종 17년(1562)에 강릉부사로 부임하여 시조 명주군왕능묘를 수축하고 강릉김씨 을축보를 발간하였으며 이어 사헌부집의와 성균관 사성을 거처 좌승지와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대사성.대사간과 형조참판을 지냈으며 예조판서에 올랐다 26세 선여(善餘) 좌랑 예조판서 첨경(添慶)의 장자 선조 23년(1590)때 문과대과에 급제 다음해 대제학 류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이조좌랑 이유징(李幼澄)과 함께 독서당에 들어같다 이어서 예문관 검열에 오르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관으로서 선조를 호송하였다 1599년에 검열.대교.봉교를 지내고 예조좌랑에 올랐으나 1602년 옹진현령으로 좌천되었다 선여까지 3대가 모두 급제하였다 27세 득원(得元) 봉사 좌랑 선여(善餘)의 양자이고 생부는 공조참의 몽호(夢虎)이고 인조 11년(1633)에 34세로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실패한 듯 순능참봉 전옥서 봉사등 하급관리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백동파 가문의 기초를 닦은 분이다 28세 홍주(弘柱) 참봉 봉사 득원(得元)의 장자 로 음사로 헌능 참봉을 지냈다. 28세 홍집(弘輯) 진사 봉사 득원(得元)의 2자, 28세 홍정(弘楨) 좌승지 봉사 득원(得元)의 3자, 숙종 7년(1680)에 문과대과에 급제하고 여러관직을 거처 좌승지에올랐다. 28세 홍기(弘機) 현감 봉사 득원(得元)의 4자, 숙종 36년(1710)에 출사하여 관직을 두루 거처 송화현감을지냈다 28세 홍권(弘權) 도정 봉사 득원의 5자, 숙종 37년(1711)에 감역으로 출사 돈녕부 도정을 지냈다 29세 시환(始煥) 좌참찬 참봉 홍주(弘柱)의 3자가 숙종26년(1700)때 문과에 급제하여 1703년에는 전적과 병조좌랑이 되고 봉양을 위하여 영유현령(永柔縣令)으로 전임하였다 1707년에는 지평을 거처 교리.집의.사간.등 여러관직을 거처 동래부사.이천부사.강개부사와 평양감사 그리고 좌참찬 을 지내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었으며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29세 시현(始炫) 사마 문과 홍주(弘柱)의 2자 29세 시혁(始奕) 공조판서 참봉 홍주(弘柱)의 3자, 숙종 34년(1708)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정언을 거처 강화 유수로 나아가 중국에서 전해온 번벽법(燔壁法)으로 강화도 외성을 축조하였다. 그공로로 영조 20년(1744) 한성부판윤이 되었다가 이듬해 공조판서에 다시 승진 좌참찬에 올랐다가 만년에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효헌(孝憲) 29세 시형(始炯) 병조판서 참봉 홍주(弘柱)의 5자로 숙종 36년(171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숙종 43년(1717)대과에 급제하였으며 여러 벼슬을 거처 숭록대부 병조판서에 올랐다. 숙종은 어제(御製) 묘석을 내렸다. 29세 시희(始熺) 도정 홍주(弘柱)의 6자 진사시에 급제하고 양주목사를 지냈다. 29세 시정(始炡) 한산군수 진사 홍집(弘輯)의 자, 29세 시경(始炅) 진사 좌승지 홍정(弘楨)의 장자, 29세 시걸(始傑) 호조참판 좌승지 홍정(弘楨)의 2자, 29세 시엽(始燁) 지평 현감 홍기(弘機)의 장자,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거처 지평에 올랐다 29세 시위(始위) 동부승지 현감 홍기(弘機)의 차자, 진사시에 합격하고 영조 6년(1730) 정시 문과대과에 급제하고 주서로 출사 여러 관직을 거처 우곡현감을 역임하고 동부승지를 지냈으며 또한 영광군수를 지냈다 29세 시영(始煐) 한성판윤 도정 홍기(弘機)의 장자, 진사시에 합격하고 희능참봉으로 출사 여러관직을 거처 광주목사를 지냈고 영조조에서 기로소에 들러 정시관(庭試官)과 한성판윤으로 봉조하에 가자 받았다 30세 상규(尙奎)대사간 좌참찬 시환(始煥)의 장자, 숙종 31년(1705) 문과대과 급제하여 양사응교를 거처 경기도 광주목사와 사간원 대사간을 거처 전라감사를 역임했다 30세 상벽(尙壁) 진사 좌참찬 시환(始煥)의 2자 증 이조참판, 30세 상익(尙翼) 예조판서 좌참찬 시환(始煥)의 3자로 영조 1년(1725)에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1729년에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이 되고 1732년 충청도어사를 거처 홍문관수찬, 교리, 사간원 헌납등 청환직(淸宦職)을 두루거첬다. 1735년에는 이조좌랑,이듬해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거처 대사간에 오르고 1738년에는 승지, 1750년에는 경기도 관찰사 대사헌을 거처 1757년에는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1759년에는 도승지1763년에는 지경연사(知經筵事),1765년에는 강화유수를 거처 1767년 기로사에 들어가 봉조하(奉朝賀)를 지내고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형제 숙질 가운데 기로사에 들어간 사람이 여섯 명이 되어 복문(福門)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30세 상성(尙星) 이조참판 좌참찬 시환(始煥)의 4자, 경종 3년(172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정시에 장원하였는데 전적과병조좌랑 지평을 사양하고 영조 1년(1725)에 사간원정언이 되었고 왕이 어려운 일이 있을때마다 공에 묻는 일이 많아 상소를 올려 그 공정함을 인정받은 일이 많았다 영조 9년(1733)대고(大誥)의 반포문을 왕명으로 짓게 하여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다 임금의 잘못을 논함에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어 사관에 본 받을 것을 명하고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이어 경상, 강원, 함경감사와 대사간, 대사헌겸 동지의금부사, 형조참판, 한성부윤겸괴원제조, 이조참판을 지내고 영조 26년(1750)에 호조, 병조, 예조판서를 지내고 세자좌부빈객, 판돈녕부사겸 판의금부 지경연상의원제조를 더하여 숭록대부에 올랐다 타계하니 왕명으로 예장케하였다 30세 상두(尙斗) 현감 좌참찬 시환(시환)의 5자 30세 상중(尙重) 공조판서 이조판서에 추증돤 시현(始炫)의 차자로 영조 8년(1732)정시(廷試)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자헌대부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공이 70세에 타계하니 왕이 조시와 제문을 내려 예장케 했다. 30세 상철(尙喆) 영의정 공조판서 시혁(始奕)의 자로 영조 9년(1733) 사마시를 거처 1736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지평.교리를 지내고 1757년에 충정도 관찰사에 이어 대사간.한성판윤을 지냈으며 이어 이조.형조.병조판서를 역임하고 그뒤 평안도 관찰사를 거처 1766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다. 학덕이 뛰어나 영조의 신임을 받았고 우의정때 우리나라의 문물제도를 부분별로 망라한 문헌의 필요성을 느껴 왕에게 건의하여 찬집청(纂集廳)을 두어 1770년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했다 한편 1771년에는 『명사(明史)』에 실린 『강감합찬(綱鑑合纂)』에 조선왕실의 계보가 잘못 올라 있다는 상소가 있자 자진해서 선계변무사(璿系辨誣使)로 북경에 가서 그 책의 개인소장을 금하겠다는 청나라의 약속을 받고 돌아와 『신묘증광록(辛卯重光錄)』을 편집 간행하고 정조5년(1781)에 기로소에 들어간뒤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86년 아들 우진(宇鎭)이 소론 윤선거(尹宣擧)문집을 훼판한 병신처분(丙申處分)의 잘못으로 숙종이 지적하고 소론 조태구(趙泰耉).류봉휘(柳鳳輝)를 옹호한 죄로 제주도에 유배될때 공도 아들을 전보(全保)못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작되었다, 죽은뒤 정조의 조처로 복관하고 충익(忠翼)의 시호를 받았다 30세 상우(尙遇) 병조판서 시형(始炯)의 장자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휘능 참봉과 장성부사와 선공부정을 지냈다 30세 상적(尙迪) 예조판서 병조판서 시형(始炯)의 차자로 영조 9년(1733) 문과대과에 급제하고 여러요직을 거처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30세 상선(尙選) 도사 병조판서 시형(始炯)의 4자, 사마시에 합격하고 참봉과 동부도사를 지냄 30세 상정(尙廷) 감목 병조판서 시형(始炯)의 5자, 생원시에 합격하고 학관과 감목관(監牧官) 30세 상덕(尙德) 만호 도정 시희(始熺)의 차자, 30세 상구(尙耉) 대사간 한산군수 시정(始炡)의 장자로 영조 10년(1734)에 무과대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처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했다. 30세 상효(尙孝) 남평현감 진사 시경(始炅)의 장자, 음사로 출사하여 여러 관직을 거처 남평현감을 지냈다 30세 상집(尙集) 판서 우참찬 판윤 시영(始煐)의 자, 영조 31년(1755) 정시 문과에 급제, 사관을 거처 정언이 되고 경현당(景賢堂)의 문신 제술(製述)에서 장원하여 문명을 빛냈다 1763년 홍양한(洪良漢)의 일파로 삭직되었다가 경기도 강원도 암행어사를 지내고 1766년 부수찬, 교리, 헌납, 영조 48년(1774)에 이조참의를 거처 주청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뒤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거처 경상도 관찰사로서 화전이 늘어나는것을 방지못하혀 파직되었다가 한성판윤을 거처 병조.공조.예조의 판서와 우참찬을 지냈다 31세 노진(魯鎭) 이조판서 대사간 상규(尙奎)의 계자로 정조 7년(1757)에 문과대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순조때 예조.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31세 정진(鼎鎭) 가선대부 진사 상벽(尙壁)의 장자로 음사로 돈녕부참봉으로 출사하여 두루 관직을 거처 낭천현감 및 통천군수 이천부사를 거처 찰방을 지내고 첨지겸오위장에 올라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에 오름. 31세 재진(在鎭) 괴산군수 상중(尙重)의 계자, 진사를 지내고 창능참봉과 괴산군수를 지냈다. 31세 우진(宇鎭) 광주목사 영의정 상철(尙喆)의 장자, 음사로 장능참봉에서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대성과 이의를 거처 경기 광주목사에 올랐다. 31세 영진(寧鎭) 사마 영의정 상철(尙喆)의 2자. 31세 화진(華鎭) 이조판서 생부 판서 상적(尙迪)의 장자, 장성부사 상우(尙遇)의 계자로 영조 31년(1755)에 문과대과에 급제하고 여러벼슬을 거처 예조.호조.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31세 동진(東鎭) 군수 진사 상진(尙進)의 계자 생부 상려(尙礪)의 자로 장능참봉에서 온양군수를 지냈다 31세 성진(成鎭) 현감 돈녕 시희(始熺)의 손자이고 상복(尙福)의 계자이며 생부는 상려(尙礪)로 함창현감을 역임했다 32세 계온(啓溫) 호조참판 이조판서 노진(魯鎭)의 차자로 정조 23년(1799)문과대과에 급제하고 여러벼슬을 지냈으며 이조참의와 대사성을 거처 호조참판을 역임했다 32세 계한(啓漢) 형조좌랑 가선 정진(鼎鎭)의 장자로 진사에 급제하고 장능참봉 감조관 중부도사를 거처 고령현감을 거처 형조좌랑에 오름 32세 계하(啓河) 병조참판 가선 정진(鼎鎭)의 2자. 정조 23년(1799)에 문과대과에 급제하고 옥당부교리 서장관등을 거처 강개진 병마첨절제사등을 두루거처 승정원좌승지와 의주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개성부류수 병조참판과 함흥부윤겸 병마수군절도사를 역임했다 32세 계렴(啓濂) 응교 이판 화진(華鎭)의 장자 생원시에 등제하고 광주판관을 지냈으며 정조 24년(1800)에 응교로서 정시관이 되었다 32세 계락(啓洛) 예조판서 이조판서 화진(華鎭)의 차자로 정조 7년(1783) 문과대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처 이조참의 예조참판을 거처 예조판서와 성균관사 및 오위도총관을 지냈다. 33세 학초(學初) 이조참의 계혼(啓渾)의 자로 헌종 14년(1848)에 문과대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와 대사성을 지내고 성균관사와 오위도총관을 역임했다 특히 1873년 계유대보를 발간했다 33세 학수(學秀) 감역 호조참판 계온(啓溫)의 계자, 33세 학모(學模) 도정 응교 계렴(啓濂)의 계자, 감역을 거처 청풍부사를 지내고 통정돈녕도정을 지냈다 33세 학년(學秊) 진사 동진(東鎭)의 손자 현능참봉, 34세 병억(秉億) 승지 대사성 학초(學初)의 양자, 고종 22년(1843)에 문과대과에 급제하여 좌승지를 지냈다 34세 병섭(秉燮) 군수 광주목사 우진(宇鎭)의 증손, 34세 병훈(秉薰) 군수 도정 학모(學模)의 자, 초시에 급제하여 숭능참봉으로 출사하고 부평.신평.안성.김포군수를 지냈다 35세 연수(演壽) 목사 군수 병훈(秉薰)의 자, 진사과에 급제하고 여러관직을 거처 흥양현감 대사성 강릉부사 황주목사를 지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