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시간여행
작성자 김상기
작성일 2020-02-23 (일)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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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간공 휘 첨경 직계 선후계 보학사
           숙간공 휘 첨경 직계 선후계 보학사

여말선초를 사셨던 19세 사윤공(寺尹公) 휘[이하 생략] 추(錘)부터 시작하여, 추의 3남 일노공(逸老公) 양남(揚南), 식(埴), 귀형(貴亨), 종윤(宗胤), 종윤의 2남 충정(忠貞), 숙간공(肅簡公) 첨경(添慶), 선여(善餘), 득원(得元), 득원의 5남 홍권(弘權), 시영(始煐), 상집(尙集) 등 저자의 숙간동 백동파 선후 직계 조선시대 조상님들의 가과(家科) 및 혼맥(婚脈), 묘재(墓在) 등을 인물별로 나누어 시리즈 형식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30세 상집께서 1799년(정조23)에 졸(卒)하셨으니 이 보학사(譜學史)는 무려 4백년을 아우르는 기간이 됩니다.

정조 이후 순조대부터 이른바 안동김씨, 풍양조씨, 다시 안동김씨, 흥선대원군 및 여흥민씨 등 외척의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가과(家科)의 의미가 상당부분 퇴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숙간공 백동파를 중심으로 팔판서를 배출하므로써 팔판동의 명칭이 유래하게 되었는데, 그 시원(始原)을 이루었던 득원의 장남 홍주(弘柱) 및 4형제, 그리고 그 자손들에 관한 내용도 필요한 부분을 첨가하려고 합니다.

제1부 사윤공(寺尹公) 추(錘)

19세 추(錘) 공조판서

문하시중 광을(光乙)의 장자로 공민왕 9년(1360)에 대과에 급제하여 이부원외랑에 올랐는데 홍건족이 의주를 거처 서경(평양)으로 침공하고 한편 전라도와 양광도에는 왜구들이 침공하는 등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에 공이 출전하여 전공을 세워 병부랑중과 공부전서에 올랐다 그후 조선이 개국되면서 이태조에 의해 공조판서로 제수되었다.
--> 뿌리탐구 <가문을 빛낸 인물> 3 영견대내마의 후예 22 사윤공 횡성파

* [寺尹公] 을 [사윤공] 으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시윤공] 으로 읽어야 할지 표기에 약간의 의문이 있다. 왜냐하면 봉상시(奉常寺)의 경우처럼 관청명의 경우에는 [寺] 를 [시] 로 읽고, 그 실무 책임자를 봉상시윤(奉常寺尹)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검토하기로 하고 본저에서는 홈페이지의 표현을 따라 일단 사윤공으로 부르기로 한다.

추 (추) 19 子 광을 (光乙) 계초 (繼貂) 웅 (雄) 翰林公 寺尹公派

子 錘(추)◁

擢第 始仕麗朝 工部尙書
[墓]長湍 大德山 陵谷云◁
[配]順興安氏 父 政堂文學 文惠公 元崇 外祖 直門下 原州 元善之 有四男二女◁
[配]豊川任氏 父 判司僕寺 德水 祖 判三司 西河府院君 子松 曾祖 御史大夫 澍
外祖 文忠公 益齋 慶州 李齊賢 有一男二女◁

과거에 급제하여 발탁되었고 고려조에 출사를 시작해서 공부상서에 올랐다.
[묘] 장단 대덕산 능곡에 있다고 한다.
[배] 순흥안씨로 아버지는 정당문학 문혜공 안숭원이고, 외조는 직문하 원주원씨 원선지이고, 4남2녀를 두었다.
[배] 풍천임씨로 아버지는 판사복시 임덕수이고, 조부는 판삼사 서하부원군 임자송이고, 증조는 어사대부 임주이고, 외조는 문충공 익재 경주이씨 이제현이고, 1남2녀를 두었다.

따라서 추는 2명의 부인으로부터 슬하에 모두 5남4녀를 두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정부인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재취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므로 추는 순흥안씨 부인이 사망하고 풍천임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제5남, 제3녀, 제4녀는 풍천임씨 소생이다.

인터넷족보 계보보기에 아들로는 이남, 윤남, 양남, 종남, 자남 등 5명이 소개되고 있는데 막내 자남은 풍천임씨 소생이다. 그런데 사위로는 서환, 유창, 이양명, 현효생, 김우 등 5명이 소개되고 있어 사위가 1명이 남는다.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생졸연대가 실전되어 알 수 없는 추는 아무튼 1360년(공민왕9)에 급제하였다고 하는데, 고려의 과거제도는 조선의 과거제도보다 시험과목 및 방식 등이 다양하여 위의 급제가 정확하게 어떤 과목(科目)이었는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이때의 나이를 대략 30세로 보아 1330년경에 출생하신 것으로 비정하겠다. 그리고 이태조에 의해 공조판서로 제수되었다고 하니까 아무튼 조선건국(1392) 이후까지는 생존하셨다는 것이다. 일단 추의 생졸연대를 1330년에서 1395년까지 정도로 추산하여 보겠다.

그런데 내용보기의 공부상서(工部尙書)는 고려조의 관명(官名)이지만 고려의 관제가 조선조에서도 태종 초기까지 그대로 혼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반드시 고려조에 제수된 관직이라고만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공부상서는 공조판서와 동일한 관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데 문제는 태조실록에서 “김추의 공조판서 제수”가 검색되지 않으며 더욱이 “김추” 라는 이름 자체가 아예 검색이 안된다는 것이다.

추의 첫 번째 장인 순흥[현 경북 영주시 순흥면] 안씨 안원숭(安元崇)은 고려조에서 1341년(충혜왕 후2)에 신사문과에 급제하고 정당문학 대제학을 역임한 분으로 그 유명한 회헌(晦軒) 안향(安珦 또는 安裕)(1243-1306)의 증손자이다. 안향은 고려에 주자학을 처음 도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호 회헌은 말년에 직접 주자의 호 회암(晦庵)을 모봉하여 자호하였다고 한다. 안원숭은 추의 아버지 18세 광을(光乙)과 사돈간이므로, 광을도 안원숭과 연배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향은 1260년[고려 원종 1년] 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령왕(忠烈王)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유학(儒學)의 학풍(學風)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門下)에서 백이정(白이正), 우 탁(寓倬) 등 훌륭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문묘(文廟)를 비롯한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장단 대덕산에 있고, 경기도 부곡에 안자묘(安子廟)가 있다. --> 순흥안씨 대종회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그곳에 세웠다.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643년(인조 21)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이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이하 대백과)

안원숭의 아들 안원(安瑗)은 추의 처남이 된다. 안원은 1374년에 문과급제하고 개성유후를 지낸 사람인데, 그의 생몰연대(1346-1411)를 볼 때 추와 10여년 정도 차이가 나는 손아래 처남으로 보인다. 태종실록 권22에 전 개성유후 안원의 졸기에 “사람 됨이 온화하고 누그러지고 부지런하고 근신하고 용의(容儀)가 장엄하고 진중하여, 비록 창졸(倉卒)한 일을 당하여도 일찍이 질언(疾言) 거색(遽色)이 없었다.” 고 표현되어 있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라 하였다.

안원의 아들 6형제 중에서 장남이 안종약(安從約)이다. 안종약의 생몰연대는 알수 없으나 1388(우왕14)년에 문과급제하여 고려조에 출사하고 두문동 72현에 들었다가 조선조에서 다시 출사하였는데 사헌부 잡단(雜端)을 역임하다가 1401년(태종1)에 황주 판관(判官)[종5품]으로 외직에 제수되는 기록이 실록에 보인다. 따라서 안종약은 추의 외조카이며 양남의 외사촌이 된다. 안종약과 김양남은 내외종간으로 연배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순흥안씨의 후손이며 우리가 흔히 알 수 있는 유명한 인물로 안중근 의사, 도산 안창도, 애국가의 안익태 선생 등이 있다.

안원숭의 장인이 원주원씨 원선지(元善之)이다. 대백과에 인물이 소개되어 있다.

1288(충렬왕 14)∼1337(충숙왕 복위 6).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중찬(中贊) 부(傅)의 손자이며,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경(卿)의 아들이다. 폐신(嬖臣 : 간신)인 아버지의 추천으로 7세에 서면도감판관(西面都監判官)이 되고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의 직에 올랐다. 1311년(충선왕 3)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에게 불려가 우부대언(右副代言)·지삼사사(知三司事)가 되었으며, 또 아버지의 직을 물려받아 소신교위 정동도진무(昭信校尉征東都鎭撫)가 되었다. 1324년 밀직부사가 되고, 이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르러 사임하였다. 다시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가 되었으나 물러나 한거하였다. 거문고와 바둑에 능하였고, 약제(藥劑)에 조예가 깊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였다. -->대백과

추의 두 번째 장인 풍천임씨 임덕수(任德水)의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덕수의 아버지 임자송(任子松)은 대백과 인물편에 소개되어 있다. 익재 이제현(1287-1367)과 사돈간이므로 연배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자송 :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豐川). 어사 주(澍)의 아들이다. 1319년(충숙왕 6)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가 죽자 원윤으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상을 고하였다. 1321년 이의풍(李宜風)과 더불어 동지밀직사사가 되었으며, 1324년 직조언량익찬공신(直朝言亮翊贊功臣)에 올라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1327년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일이 수습되면서, 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보필하였던 신하들에 대한 포상이 내려졌는데, 서하군(西河君)으로서 1등공신에 봉하여졌다. 1330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있다가 즉위하자 만호 권겸(權謙)과 같이 원나라 객성부사(客省副使) 칠십견(七十堅)을 따라 국왕인(國王印)을 가지고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 해 찬성사가 되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조적(曺왅)을 토죄하고 왕을 원나라에서 잘 옹위한 공으로 다시 1등공신의 호를 받았다. -->대백과

추의 아들들 중에서 장남 이남(以南)은 실록에 1408년(태종8)에 호조정랑, 1409년에 사헌장령으로 제수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2남 윤남(允南)은 1476년(성종7)에 병조의 고신(告身)이 회수되는 기록이 있고, 4남 종남(從南)은 1401년(태종)에 응방(鷹坊)의 관리로서 당시 사헌잡단이던 허조(許租)와 마찰을 빚은 기록이 있다. 5남 자남(自南)의 기록은 검색되지 않는다.

추의 사위 5명 중에서 현효생과 김우의 기록이 문과방목에 보이는데, 먼저 족보 내용보기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 玄孝生(현효생)◁
昌原人 上護軍 父 克昭◁

현효생은 창원인으로서 상호군[무관 5위의 정3품]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현극소이다.

서 金 우(김우)◁
光山人 判事 父 尙書 海陽君 懷祖
子 資忠
女 高承顔 文 翰林 柳孟敷 正郞 黃理 翰林◁

김우는 광산인으로서 판사를 지냈으며 아버지는 상서를 지낸 회양군 회조이다.
아들은 자충이며, 사위들로 문인이며 한림원을 지낸 고승안, 정랑[정5품]을 지낸 류맹부, 한림원을 지낸 황리가 있다.

문과방목에 보면 창원인 현석규(1430-1480)가 1460년(세조6)에 급제하였는데, 아버지가 현효생이고 조부가 현극소로 기재되어 있다. 세종대에 세조가 잠저시절 제천정(濟川亭)에서 백부들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을 모시고 연회를 베풀다가 과거를 보러오는 석규의 옷차림이 눈에 띄어 인연이 맺어져서 나중에 효령대군의 2남 서원군(瑞原君 1413-1475)의 사위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碩은 錫[아명]으로도 표현되어 있다.

추의 사위 현효생은 양남과 처남매부지간이고 현효생의 아들 석규와 양남의 2남 식(埴)은 같은 내외종간 항렬로서 연배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문제는 현석규의 외조부가 성주이씨 이비(李비)라고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현효생의 장인이며 현석규의 외조부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 강릉김씨 김추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현효생은 김추의 딸 강릉김씨 아내와 사별한 뒤 재취하여 성주이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석규를 낳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문과방목에 1454년(단종2)에 급제한 김해(金晐)의 기록이 있고, 그의 부가 자경(資敬), 조부가 첨(瞻), 증조부가 회조(懷祖)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회조의 선계기록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판도판서(版圖判書). 충렬왕(忠烈王) 2年(1276) 병자문과(丙子文科)에 급제(及第)한 후 원(元)으로부터 정동중서생(征東中書省)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이란 관직을 받았고 고려(高麗) 조정(朝廷)에서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을 지낸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손자(孫子)요, 3형제(兄弟) 등과(登科) 중의 하나인 밀직사(密直使) 화평군(化平君) 광철(光轍)의 아들이다.

따라서 김우는 김첨과 동기간이며 자충은 자경과 4촌간이란 족보가 나온다. 그리고 3형제 등과의 다른 한명이 광후(光厚)이며, 광후의 손자가 自知이고, 自知의 증손이 바로 허항·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일컬어지는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이다. 김우의 우자는 한자가 미기재로 되어 있는데, 동기간인 첨(瞻)이 눈목자 부수인 것으로 보아 우(盱) 자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여말선초의 명문가인 광산김씨와 사돈을 맺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윤공 집안의 가세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윤공 김추는 이성계(1335-1408)와 비슷한 시기인 대략 1330년(충혜왕 초기)경 태어나 1350년(공민왕 초기)경 결혼할 당시에 정당문학 대제학을 지낸 안원숭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할 정도의 가세를 갖고 있었다. 순흥안씨 부인은 6남매를 낳고 대략 30대 중반 정도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 풍천임씨 자송의 손녀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족보 내용보기와는 달리 1남 3녀를 둔 것 같다. 따라서 모두 5남5녀를 두었다.

그리고 1360년(공민왕9)에 문과급제하고 출사하여 공부전서라는 높은 벼슬까지 역임하였는데, 말년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이미 연로한 마당에 조선조에는 더 이상 출사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정절파(靖節派)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자식들이 조선조에 출사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던 것 같다.

추의 자식들은 고려조에 출사하여 벼슬을 하다가 조선조에서도 대략 5품내지 4품 정도의 벼슬을 한 것으로 보이고, 다만 3남인 양남은 조선조에서는 더 이상 출사하지 않았다. 그것은 양남의 호가 일노공(逸老公 유유자적하는 늙은이)이란 점, 외사촌인 안종약이 두문동 출신이란 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양남의 학문적 스승은 아버지 추와 동문수학했던 두문동 출신으로 보인다.

다음 제2부에서 일노공 양남을 소개합니다.

숙간공 백동파 38세 형기

후세들이 알아야 할 훌륭한 자료를 기대합니다.
     서울종친회 문화분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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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숙간공 휘 첨경 직계 선후계 보학사 김상기 2020-02-23 525
70 자료를 구합니다 장 태 기 2017-01-14 536
69 자료협조요청 장 태 기 2017-01-14 660
68 자료 확인 장태기 2017-01-13 488
67 시영(始煐:29세) 선조 묘지석(墓誌石) 서울종친회 2015-01-12 1549
66 휘 경선(景선)公 墓誌 서울종친회 2015-01-05 734
65 옥가파 종댁<7-끝> 김형기 2014-06-28 3868
64 옥가파 종댁<6> 김형기 2014-06-10 1617
63 옥가파 종댁<5> 김형기 2014-05-31 1638
62 옥가파 종댁<4> 김형기 2014-05-30 1665
61 옥가파 종댁<3> 김형기 2014-05-27 1071
60 옥가파 종댁<2> 김형기 2014-05-27 1345
59 옥가파 종댁<1> 김형기 2014-05-25 2308
58 태사공 부정공 보진재공 노암파 - 金文起 회장 가문<8-끝>.. [37] 김형기 2014-05-20 2018
57 태사공 부정공 보진재공 노암파 - 金文起 회장 가문<7> 김형기 2014-05-18 1365
56 태사공 부정공 보진재공 노암파 - 金文起 회장 가문<6> 김형기 2014-05-16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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